삼국시대는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 사회’로 인식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이 매우 다양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은 제도, 문화, 풍습 면에서 차이를 보였고, 이 속에서 여성은 단순히 가정 내 보조자의 역할만이 아닌 정치, 종교, 군사, 경제 전반에서 활동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여왕이 통치했던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국가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 여성의 실제 삶을 ‘역할’, ‘권리’, ‘문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오늘날의 시선으로 재조명해 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여성들 – 정치와 종교의 주체비교
삼국 중 고구려는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구조를 보였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 따르면, 왕비나 왕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궁중 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실제로 고구려 유리왕 시기에는 왕비가 국정 회의에 참석하거나 왕자 교육에 개입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또한 고구려는 ‘서옥제’라는 독특한 혼인 풍습을 갖고 있었는데, 이 제도는 남성이 일정 기간 장인의 집에서 노동을 하며 신뢰를 쌓은 후 결혼을 허락받는 방식으로, 여성을 단순한 ‘소유’로 보지 않았다는 사회적 시각이 반영된 풍습이었습니다. 백제의 여성은 상대적으로 ‘왕후’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대표적으로 무령왕의 왕비는 정치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으며, 왕의 대리로서 사신을 접견하거나 궁중 내 각 부서와 교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유교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여성이 공적 공간에 나서는 비율은 줄었으나, 왕실 여성은 여전히 중요한 정치 자산이었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유일하게 여왕이 직접 왕위를 계승한 국가입니다. 선덕여왕(632~647), 진덕여왕(647~654)의 통치기는 단순한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라,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신라의 유연한 신분 체계와 관련이 깊습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고, 진덕여왕은 ‘진덕왕서(眞德王書)’를 남기며 중앙 집권 강화를 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여성 통치자’가 아닌, 당대 정치 전반에서 여성이 충분히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혼인, 상속, 생활 속 여성의 권리와 실질적 위상
삼국시대의 여성은 단순히 ‘집안일을 맡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일부 권리는 더 강하게 인정된 사례도 있습니다. 특히 혼인과 상속 제도는 고대 여성의 권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먼저 혼인 관습을 보면, 앞서 언급한 고구려의 서옥제 외에도 신라에서는 여성의 결혼 후 독립 거주가 흔했습니다. 이른바 ‘처가살이’ 또는 ‘부부 별거’ 형태의 생활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는 여성의 친가와의 관계가 지속되고 친정이 여전히 여성의 보호 기반으로 기능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또한 결혼 후에도 여성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독립적으로 사유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속에서도 여성은 일정한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삼국사기』와 각종 고대법령에 따르면, 자녀 간의 상속에서 딸도 일정 비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특히 무남독녀일 경우 여성의 상속 비율은 매우 높았습니다. 이는 고려 시대까지 이어진 전통이며, 조선 시대 유교적 영향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여성을 배제한 상속은 드물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여성은 장터의 주인이자, 생산자이자, 상인이었습니다. 각국의 시장 통제기록이나 세금 관련 문서를 보면 여성 상인의 이름이 적혀 있고, 심지어 세금을 독립적으로 납부한 사례도 확인됩니다. 고대에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이 일정 수준 보장되었으며, 이들이 사회경제적 주체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여성은 가정 안팎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권리를 행사했고, 단순히 ‘남성의 그림자’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복, 장신구, 의례를 통해 본 여성 문화의 정체성
삼국시대 여성의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의복과 장신구, 의례와 같은 문화적 요소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분 벽화, 출토 유물, 문헌 기록 등은 고대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의복’을 적극 활용했음을 보여줍니다. 고구려 벽화 무덤에서는 화려한 색상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여성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의 머리 장식과 비녀, 귀걸이 등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신분을 드러내는 표시였으며, 특히 금이나 옥으로 만든 장신구는 고위급 여성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머리 모양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미혼 여성은 땋은 머리를, 기혼 여성은 쪽진 머리를 하는 등 시대별, 신분별 구분이 명확했습니다. 백제는 섬세하고 정교한 금세공 기술로 유명했으며, 여성 장신구에서도 그 기술이 반영되었습니다. 특히 관모(冠帽)와 귀걸이, 가슴 장식 등의 형태에서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이 드러나며, 이는 국제 문화 교류 속에서 여성 복식 문화도 발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여성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존재가 아닌, 권위와 신분의 표식으로 장신구를 활용했습니다. 신라는 화려함보다 절제미가 강했습니다. 통일 신라 시기 유물 중에는 유리구슬, 간결한 은제 장신구가 다수 출토되며, 이는 불교적 영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라 여성은 의례나 제사에 참여하는 역할도 많았는데, 특정 여성은 제사장 역할을 맡아 국가적 제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종교적 권한이 단순한 보조가 아니라 중심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의복과 장신구, 제의 참여를 통해 본 삼국시대 여성의 모습은 단순한 종속적 존재가 아니라, 신분과 문화의 주체로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결론
삼국시대 여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정에 머무는 조용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정치와 종교, 경제, 문화 전반에 깊숙이 참여하며,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했습니다. 선덕여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부터 시장의 여상인, 제사의 주관자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각계각층에서 활약했습니다. 삼국의 다양한 제도와 문화 속에서 여성은 제도적으로도 권리를 보장받았고, 스스로 삶의 주체로서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삼국시대 여성을 단순히 ‘과거의 조연’이 아닌, ‘역사의 주연’으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여성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은 오늘날에도 많은 통찰을 줍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비추는 지혜가 바로 이 안에 숨어 있습니다.